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오노 나나미 (문단 편집) === 편향된 관점 ===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학자가 아니며, 스스로도 아마추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소설가 혹은 역사 에세이스트에 가깝다는 것을 감안하고 읽기 바란다. [[로마인 이야기]]를 비롯한 시오노의 저작들을 살펴보면, 역사 자체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특정 인물과 특정 국가에 대한 관심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본인이 좋아하는 남성에 대해 서술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데, 특히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체사레 보르자]]에 애정이 대단하며 그중에서도 카이사르에 대해서는 단순한 호의적 서술을 넘어 거의 숭배에 가까운 수준으로 치켜세운다. 원래 로마사에 관심있는 사람들 중에 카이사르 팬이 꽤 많기는 하지만([[http://kalnaf.egloos.com/2486805|#]]) 시오노는 카이사르에 대한 애정을 상당히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로마인 이야기]] 15권 중 카이사르 개인에 대한 책이 2권(4, 5권)이나 되며 다른 책에 비해 꽤 두껍다.[* 그 앞뒷권인 3권과 6권의 두께가 얇기 때문에, 꽂아두고 보면 더 두꺼워 보인다.] 내용은 '카이사르를 위한 헌정문'으로 봐도 될 정도로 카이사르 띄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반대로 그와 대립했던 많은 인물들은 지나치게 깎아내리고 있다. 특히 [[키케로]]를 엄청나게 깎아내린다. 키케로에 관한 사료를 보면 카이사르의 내전이 일어났을 당시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원로원파와 카이사르파 중 한 쪽을 선택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원로원 측에 붙는 기회주의적인 면을 알 수 있으며, 법적으로 그다지 깔끔하지 못했던 [[카틸리나 탄핵]]으로 평생 자뻑하고, 카이사르 집에 갔는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비서가 번호판을 받고 기다리라고 했다며 친구에게 불평하고, [[클레오파트라]]가 약속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고 건방지다고 폄훼하는 등 쪼잔한 면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시오노 나나미가 깎아내리는 수준의 한심한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마리우스-술라의 시대로부터 2차 삼두정치에 이르기까지 키케로만큼 명확한 정파적 입장을 가진 이가 살아남은 예가 없다. (하물며 키케로는 술라의 잔혹함을 비판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이다.) 이는 도리어 키케로가 그만큼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다만 이런 관점은 당연하겠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고유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런 관점의 역사학자들도 얼마든지 있었고 또, 근거가 없지도 않다. 당장 로마에서 카이사르 사후 안토니우스가 잠시 헤게모니를 잡는 동안 키케로는 자기 아들이 있던 그리스로 튀었던 적이 있다. 그러다가 옥타비아누스가 와서 안토니우스의 대항마가 되지 그에게 붙어서 안토니우스를 디스했고.] 시오노 나나미에 대한 반감으로 한국 서브컬쳐계에서 카이사르를 역으로 너무 깎아내리고 키케로나 술라 등을 너무 띄워주는 경향이 보이기도 했다. 카이사르에 푹 빠져서 있는 탓에 그가 갖고 있었던 성향들을 다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체사레 보르자]] 외에도 좋아한다고 밝힌 남자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있는데, 다빈치의 경우 에세이집 '이탈리아에서 보낸 편지' 에서 밝힌 바로는[* 2권 '레오나르도 내 사랑'] 그가 [[자연과학]] 쪽에서 남긴 업적을 쓰기 어려워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경우 [[이라크]] 등 [[중동]]의 정세가 좋지 않아 방문할 수 없어서 쓰지 못했다고 밝혔다. 전쟁 3부작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편에 보면, [[오스만 제국]] 술탄 [[메흐메트 2세]]의 남색 상대인 [[노예]] 소년과 술탄의 성애에 대한 묘사가 [[동로마 제국]]의 재상 루카스 노타라스보다 비중이 높다. 그 '남색용 노예'가, 메메드 2세의 치세에 대해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역사서인 <정복자의 역사(Tarih-i Ebülfeth)>를 쓴 투르순 베이(Tursun Bey)이기는 하나, 이것은 자신의 기록으로 밖에 알 수가 없는 탓에 궁정 시종이었던 것은 맞는 것 같지만 '남색용 노예'였다는 건 상상.[* <콘스탄티노플 함락>에는 메메드 시대에 역사서를 쓴 튀르크인은 그 혼자인 것처럼 되어 있지만, 아시크파샤자데(Aşıkpaşazade, 1400~1484)나 케말파샤자데(Kemalpashazade, 1468~1536)는 어디다 팔아먹었을까. 다만 그리스 혐오에 가까운 시오노의 '관점'을 생각하면 투르순 베이의 기록을 따라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최후의 순간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다가 끔살당했다고 기록했을 법도 한데, 왜 장렬히 전사했다고 했는지 의문.] 물론 '[[동로마 제국]] ⊂ [[로마 제국]]'이지만, 시오노는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의 한 시대로 보는 걸 부정하는 사람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반기독교 사상 탓에 특정 시대의 정체불명 자기 취향에 맞는 로마 제국만 로마 제국이라고 하는 사람이라 동로마 제국을 폄하한다.[* 전쟁 3부작은 작자 자신도 인정한 소설이다. 역사 에세이에선 살짝살짝 드러나던 [[BL|작가의 취향]]을 소설에선 감출 필요가 없어졌는지, 3부작 중 2작품은 주인공이 동성애를 하고, 남은 하나에선 불륜을 한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고, 소재로 쓸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주 내용과 별개로 뜬금없이 등장한다는 것이 문제. 물론 전쟁 3부작의 주제가 '전쟁터에서 피어나는 낭만적 사랑 이야기'라고 한다면야 할 말 없다.] '''좋아하는 [[국가]]나 [[도시]]도 상당히 티가 난다.''' 이 양반의 [[이탈리아]] 사랑, 특히 [[베네치아]] & [[고대 로마]][* 중세사 전체를 제외한] 사랑은 정말 엄청난 수준이라, '역사소설'의 한계조차 넘어 거의 [[대체역사소설]]에 이를 정도다. 거의 유일하게 여성들에 대한 평가가 좋고 여성 인물들에게 주목한 저서로는, <르네상스의 여인들>이 있다. <남자들에게> 1, 2라는 에세이집을 냈는데, 여자가 바라보는 남자의 시각을 썼고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가도 받지만, 여성 상품화에 대한 [[안티테제]]적인 관점을 [[페미니즘]]으로 포장했다는 비판과 '[[병맛]] 넘치는 [[중2병]] 여성을 위한 지침서'라는 혹평도 있다. 또 전쟁 3부작에 나오는,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된 이후에 '황량해졌다'고 하는 말도 [[개념은 안드로메다로]] 보낸 다음에나 나올 법한 말.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황제 메흐메트 2세가 치세 내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일 가운데 하나가, 콘스탄티노플을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여러 민족이 한데 어울리는 [[국제도시]][* [[이슬람]]이 우대받고 기독교 등 나머지는 그보다 못한 지위를 가졌지만, 그 당시에는 진보적인 정책이었다.]로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인구 추정치만 해도 1453년 당시 4만 5천 명에서 1500년에는 20만, 1550년에는 66만으로 폭증.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에서는 보다 역사를 반영해서 "술탄 아래가 모두 평등하다"는 표현을 하였지만, 사실 이것도 [[군주론]] 4장에 나오는 마키아벨리의 표현을 빌린 것이다. "인재 등용에 있어서 능력을 우선시했다"고 말하고 있다. 근데 그러다가도 일관성 없는 정책을 펼치고 물량빨로 밀어붙이며 변덕이 심하다고 또 비난한다. 하지만 시오노가 찬양하지 못해서 안달하는 [[로마 제국]]도 물량빨로 밀어붙인 적이 간혹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시오노의 평은, '소규모 군대만 찔끔찔끔 보내면 쓸데없는 희생이 커지잖음. 그런데 [[로마 제국]]은 한꺼번에 대군을 보내서 이런 희생을 줄였으니 이 얼마나 훌륭하고 위대한 일임?'이다.[* 가령 서기 73년에 벌어진 마사다 공방전에 대해 서술할 때 수비군은 천 명도 안 되었는데, 공격 측인 [[로마군]]은 만여 명이었다고 소개하며 이와 같이 주장했다.] 기독교 국가들의 시각에서만 바라볼 뿐, [[오스만 제국]]의 내부 사정이나 정치적 변동에 대해서는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무지 내지는 무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시오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해 상당히 무지한 편으로, [[시파히]]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예니체리]]만이 오스만의 상비군이었다고 하는 것이 그 예인데,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하권 초반부에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 대해 언급하며 이와 같이 서술했다. 황제 메메드 2세가 믿을 만한 군대라곤 예니체리 부대뿐이었으며 거의 매년 군사를 보내어 정복에 몰두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추측'''했는데, 실제로 오스만이 팽창에 열심이었던 것은 창건자 오스만 1세 이래로 '이교도를 공격하여 이슬람의 땅을 넓힌다'는 사상이 일종의 국시 비슷한 것이었던 데다, 지방관의 인사고과를 평가할 때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던 것이 바로 군공이었기 때문. 그리고 메메드 2세 본인으로 한정하면 그의 평생 꿈이 [[로마 제국]]의 재건이었는데, 로마 제국을 재건하려면 당연히 로마 시를 함락해야 하고. 그러자면 당연히 군사 활동에 나서야 할 것이 아닌가.[* 실제로 말년에는 [[이탈리아]] 본토를 해로로 침공하여 오트란토라는 항구도시를 점령하기도 했다. 다만 바로 이듬해에 메메드가 죽으면서 로마 진격은 백지화.] 게다가 예니체리는 일종의 특수병이었고 오스만의 주력은 어디까지나 시파히였으니, 시파히의 존재를 제대로 몰랐다는 건 시오노가 오스만 제국이 벌인 육전에 대해서는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았다는 말이 된다. 오늘날 지명도야 물론 다른 문제지만, 메메드 2세 시대부터 쉴레이만 1세 시대까지 오스만 제국에서 시파히가 무시당했다는 건 로마 제국으로 치면 군단병은 어따 팔아먹고 '로마 제국군은 몇 안 되는 근위대를 제외하면 속주민 부대하고 용병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라고 지껄인 거나 마찬가지다. 가령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를 다룬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 나오는 '스쿠타리[* 알바니아어로는 슈코더르.] 공방전'의 경우, 시오노가 '''"체계적이고 정확하다"'''고 찬양하는 베네치아의 역사가 마린 바를레티가 오스만 제국군의 수를 무려 '''35만'''으로 잡은 예가 있다. 물론 오늘날 역사가들은 "앞의 1자가 3자로 바뀐 거 아니냐"고 하는 중. 본인이 살고 있는 [[이탈리아]]도 자주 비판하며, [[영국]]은 대체로 찬양조다. "관리가 부실한 이탈리아의 [[로마 제국]] 유물을, 관리를 잘하는 [[영국인]]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현대 영국은 유물 보존 관리 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국가이지만, 제국의 변방이었던 영국[*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영국이 고대 유물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독자적인 켈트 부족의 문화도 결코 흔히 생각하던 야만족 수준은 아닐 뿐더러, 시골 박물관에도 로만 브리튼 시대의 유물이 수두룩하다. 다만 본토였던 이탈리아가 당연히 관리해야 할 유물이 많을수밖에 없다는 뜻.]과 제국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다만 본인부터도 스스로 "나는 아마추어요."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즉, 그는 사실을 기반으로 적되, 그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에는 주관을 개입시킨 것이다. 역사서로 생각할 게 아니라 적당히 재미있게 읽으면 그만이다. 배경지식이나 비판 능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사람은 이러한 부분을 걸러보기 힘들다. 독자로서 비판적 사고를 하며 읽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